三派 |
二派 |
一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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檢校公派 |
祭酒公派 |
少尹公派 |
文肅公派 大司憲派 |
문숙공파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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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煥(환) |
○ |
○烈(열) |
○慶(경) |
○煥(환) |
24 |
(치)致○ |
(성)聖○ |
○中(중) |
(재)在○ |
(교)敎○ |
25 |
○鎭(진) |
○範(범) |
(상)商○
○商 |
○鎭(진) |
○鎬(호) |
26 |
(주)注○ |
(국)國○ |
○濬(준) |
(영)泳○ |
(승)承○ |
27 |
○春(춘) |
○善(선) |
(병)秉○ |
○植(식) |
○模(모) |
28 |
(사)思○ |
(용)鎔○ |
(광)光○ |
(희)熙○ |
(병)炳○ |
29 |
○基(기) |
○源(원) |
(치)致○ |
○基(기) |
○均(균) |
30 |
(종)鍾○ |
(병)柄○ 相(상) |
○鎭(진) ○錄(록) |
(종)鍾○ |
○銖(수) |
31 |
○求(구) |
○烈(열) |
○澈(철) |
○泰(태) |
○求(구) |
32 |
(동)東○ |
(기)基○ |
(동)東○ |
(석)晳○ |
(수)秀○ |
33 |
○燮(섭) |
○錫(석) |
○默(묵) |
○燮(섭) |
○燾(수) |
34 |
(재)在○ |
(태)泰○ |
(재)載○ |
○圭(규) |
(효)孝○ |
35 |
이하
문숙공파
와 같음 |
○極(극) |
○鏞(용) |
○鍵(건) |
○鉉(현) |
36 |
○熙(희) |
(락)洛○ |
○浩(호) |
(원)源○ |
37 |
(재)在○ |
○采(채) |
(주)柱○ |
(영)榮○ |
38 |
○鎭(진) |
○炫(현) |
○勳(중) |
○炯(형) |
39 |
○濬(준) |
○培(배) |
○墩(돈) |
○宰(재) |
40 |
(계)桂○ |
(옥)鈺○ |
(찬)鑽○ |
(석)錫○ |
41 |
○煥(찬) |
○海(해) |
○淑(숙) |
○淳(순) |
42 |
(치)致○ |
○相(상) |
○根(근) |
○愼(진) |
43 |
○商(상) |
○杰(걸) |
○燦(찬) |
○爀(혁) |
44 |
○求(구) |
○遠(원) |
(달)達○ |
(철)喆○ |
45 |
(재)梓○ |
○鈞(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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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
(형)炯○ |
(평)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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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喆(철) |
○梓(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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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
(동)錬○ |
(경)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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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
○淳(순) |
○圻(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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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
(병)秉○ |
(전)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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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燮(섭) |
○沃(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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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
(식)埴○ |
(계)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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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
○錄(록) |
○上(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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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
(준)準○ |
(장)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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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
○植(식) |
○九(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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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
(창)昌○ |
(주)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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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
○圻(기) |
○直(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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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
(전)銓○ |
(승)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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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
○河(하) |
○五(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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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
순 흥 안 씨
우리 순흥안문(順興安門)은 휘(諱) 자미(子美) 시조(始祖)께서 창관(創貫)하신 이래 동방에 처음으로 주자학(朱子學)을 도입하여 도(道)를 창명(倡明)하신 4세조 문성공 대현을 비롯하여 문의공, 문정공, 문경공 등 자자손손(子子孫孫) 도덕문장(道德文章) 과 명경장상(名卿將相)이 계세면면 하였으니 가히 삼한의 갑족으로 이조육대성지관의 지위를 확고이 하였다. 또한 많은 애국 충신과 공신, 효자효부, 의사, 열사, 열여를 배출하였으며 특히 근세 에 와서도 도산 안창호선생과 안중근의사를 비롯하여 많은 애국독립투사와 민족의 선 구자를 배출 함으로서 우리 순흥안문은 명실 공히 동방의 명문거족으로 자처하게 되 었다. 따라서 후손된 우리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긍지를 가지고 훌륭하신 선조님 들의 유덕과 유훈, 그리고 숭고한 정신을 계승발전시켜 나가야 할 자손으로서의 책임이 있다.
우리나라의 274개의 성씨중에서 우리 순흥 안씨는 18번째가 된다고 한다. 274개성 중에서 18번째는 우리 안씨가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순흥안씨하면 순흥이 본관인 것이다. 본관은 관향 또는 관적이라고도 하는데 본관은 성씨의 시조의 출생지나 생장지 또는 연관이 있는 고을을 말하는것이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같은 성씨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이를 구별하기 위해서도 필요 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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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 안씨의 기원
- 자미(子美)시조와 순흥(順興)
우리 순흥안씨는 고려 신종때에 흥위위보승별장을 지내시고 신호위상호군으로 추봉 받으신 시조(安子美)께서 당시 흥녕(오늘의 順興)지방에 사시게 된 이후 후손들이 그곳에 정주하여 관향으로 정함으로서 본관이 순흥으로 된것이다. 그러나 시조공께서 언제부터 순흥에 거주하시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연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족보와 회헌실기등에 의하여 추측해 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2세인 추밀공선조가 1201년 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에 근거하면 시조공 께서는 서기 1200년대 이전에 순흥에 사셨을 것으로 추측이되며 1170~1180년 간에 출생하신 것으로 추측이 된다. 따라서 우리 순흥안씨는 8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수 있다.
- 시조이전의 역사
시조공의 이전에도 우리 선대가 계셨을 터인데 처음으로 간행된 족보에는 시조이전 에대하여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여기에 대하여 이 족보(병오보)의 서문에서는 기록 할수 없었던 사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다만 한스러운것은 시조이전의 가첩이 전해 내려 온 것이 없어서 기록을 다하지 못하니 이런 점이 오늘날 한없이 슬프다. 지금 수보(修譜)하지 않으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이렇게 한탄하고 게시다. 이로보아 당시의 그 선조님들의 심종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족보가 간행된지 벌써 450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시조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나 유물이 발견하지 못하니 결국 우리 순흥안씨는 시조공의 탄생연대 로부터 지금까지 8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추가 설명(시조의 묘소)
♠ 묘소는 순흥의 소백산 아래에 있다고 전해오나 찾지 못하고,순원군 응창공께서 1647년 평리촌에 시조공의 제단을 마련하고 향려단과 세연지비(洗硯地)등을 건립했다.
♠ 무오년에 후손 종욱,상봉,교덕이 사단비를 세우고,추원재(追遠齋)를 이건(移建)했음이 총록에 기록됨.
♠ 순흥의 시조사단 이전중건사업을 1985년부터 시작했다.전국의 종원 5.000여명이 성금을 기탁하여 순흥면 읍내리의 비봉산 43,000평을 宗山(종산)으로 매입하고 그곳에 始祖壇(시조단) 과 後孫11基(기), 추원단비 등을 건립하고 聖域化(성역화)하였다.
♠ 배위의 姓氏는 失傳되었다.
♠ 경북 영천에 있는 丁元旭의 집안 舊譜에 의하면 진현관대제학 문하 시중을 지낸 경(瓊)과 그의 손자인 문하시중평장사 태보내사령 혁황 의 사위에 안자미가 기록되어 있다고 하나 신중을 기하기 위해 상고 를 기다리는 바이다.
♠ 갑신파보(甲申派譜){후손 基命}에 의하면 진위에 사는 종인의 보첩에 의거하여 기록하길 "공의 묘소는 순흥부 동쪽 영마암(永磨巖)에 있으 며, 배위는 압해정씨(押海丁氏)로 추밀부사 광서(光瑞)의 따님이다. "고 하나, 이는 전보(前譜)에 실려 있지 않다.
계 파
순흥안씨 [시조] 할아버지이신 神護衛上護君公 諱 子美(자미)께서는 아들 삼형제를 두셨다. ◈ 첫째 아들인 樞密公 (추밀공) 諱 永儒(영유)는 一派 ( 큰 댁 )의 宗祖(종조)가 되시고, ◈ 둘째 아들인 神騎別將公(별장공)諱 永麟(영린)은 二派(둘째댁)의 宗祖(종조)가 되시고, ◈ 셋째 아들인 校書郞公(교서랑공)諱 永和(영화)는 三派(막내댁)의 宗祖(종조)가 되셨다.
- 제 1파의 계파(系派)
제 1파의 파조는 자미 시조공의 첫째 아드님이신 추밀원부사 휘는 영유이시며 묘소는 경북 영풍군 부석면 감곡리에 있고 그 묘소를 관리하는 재실을 영모암이라 한다. 이 묘소야말로 우리 순흥안씨 선조 묘소로서는 가장 오래 된 묘소이다. 그리고 제 1파 는 다시 나뉘며 각파마다 각 종회가 구성되어있다. 14개파로 대별되어있다. 참찬공파, 찬성공파, 직장공파, 서파공파, 감찰공파, 첨추공파, 도정공파, 참판공파, 참의공파, 부제학공파, 한림공파, 죽성군파, 탐진군파, 판관공파등이 있다
- 제 2파의 계파(系派)
제 2파의 시조는 시조공의 둘째 아드님으로 휘는 영린이시고 공은 신기별장으로 계셨고 밀직부사로 추봉 되셨는데 묘소는 실전되어 지금은 순흥의 순흥안씨 추원단에 단을 모시고 있다. 4개파로 대별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안원군파, 충정공파, 의랑공파, 소이공파등이 있다.
순흥안씨 [제 2파의 파조] 할아버지이신 別將公(별장공) 諱 永麟(영린)께서는 神騎別將(신기별장)을 지내고 密直副使(밀직부사)에 추봉되셨다. 箕封姓彙(기봉성휘)에 따르면 [공은 고려조 고종때 사람으로 송나라 淳祐(순우)2년에 서해도 秋동等按廉使(추동등안렴사)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별장공의 후손은 5세에 이러러 크게 번성하는바,순흥부원군에 봉군되신 文懿公(문의공) 諱 文凱(문개)이시다.6世에 와서 양정공 천선께서는 세아들 모두 크게 번성하여 분파한다. 둘째아들 천봉께서는 의랑공파조, 셋째아들 천보께서는 소의공파로 분파되고 다시 8世祖에 이러러 안원군파(처)와 충정공파(준)로 나뉘어진다.
- 제 3파의 계파(系派)
제 3파의 파조는 시조공의 셋째 아드님이신 휘는 영화공인데 공은 교서량을 하셨고 전리정랑으로 추봉되셨다. 묘소는 실절되어 순흥의 추원단에 단을 모시고 있다. 4개파로 대별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문정공파, 좨주공파, 중랑장공파, 검교공파등이 있다.
순흥안씨 [제 3파의 파조] 할아버지이신 校書郞公(교서랑공) 諱 永和(영화)께서는 두 아들을 두셨는 바,번성하여 차자인 득인께서는 검교공파조가 되시고 장남(득재)의 손자인 密直提學公께서 5子를 두시어 모두 번성하였다. 저 유명한 관동별곡,죽계별곡을 저술하신 문정공諱軸(축)께서는 문정공파조가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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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子인 諱輯(집)께서는 祭酒公派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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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子인 諱乙壽(을수)께서는 중랑장공파조가 되시어 가문을 번창시켰다.
순 흥 안 씨 항 렬 도(行列圖) 항렬(行列)이란 같은 혈족(血族) 안에서 上下關係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만든 세수(世數), 서열이며, 미리 정해진 글자로 각각의 世代를 나타내는 것을 항렬자라 한다.
우리민족은 일반적으로 성명중에서 (성씨를 빼고) 이름의 두 글자중 한 글자는 대부분 같은 字 즉, 돌림자를 가지 고 있다. 세수가 같으면 4촌, 6촌, 나아가 20촌일지라도 동일한 行列字로 형제관계를 나타 내고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의 字(이름)를 보고, 그 혈족의 방계에 속한 世數를 나타내는 돌림자가 곧 항렬자이다. 세수는 세대교체가 빠르게 이루어지는 장손(長孫)계통은 높고, 지손(支孫)계통일수록 낮은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 사항
行列字는 金,木,水,火,土 五行의 相生을 따라서 짓는다. 하지만 우리는 五行의 相生에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의 12간지와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와 일,이,삼,사,오,육,칠,팔,구,십,백,천,만을 붙여서 짓고 있으므로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다.예를 들어서 永字를 보면 중간에 丁이 있고 水가 있으니 從丁從水가 된다. 均字는 從二從土니 土에도 二가 있고 勻에도 二가 있으며 均은 土에 속한다. 金生水,水生木,목生火,火生土,土生金 이렇게 서로 相生토록 배정한다. 金이라고 해서 반드시 쇠금(金)변만이 金이 되는 것은 아니다. 一六水,二七火,三七木,四九金,五十土의 글자 획수로 오행을 계산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1,6,11,16,21,26획의 글자는 삼수변(水)이 아니라도 水로 본다는 것이다.) 갑을병정은 天干이요,자축인묘는 地支요,1234는 九宮이니 天干과 地支와 九宮에 五行을 붙여서 항렬자를 배정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중요한 점을 빠트릴 뻔 했다. 자기의 直祖諱字는 쓰면 안된다.
순흥안씨는 순흥의 토족 성씨이다. 고려 신종(神宗1197-1204) 때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역임하고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된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가 순흥현(順興縣)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여 관향(貫鄕)을 순흥(順興)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증손 안유(安裕=珦으로 개명하였다가 조선조 문종 어휘와 같게 되어 초명으로 쓴다)가 크게 현달하여 생활 근거지가 개성으로 나뉘어져 살게 되었다. 시조 [子美] 아들 3형제를 두었으니 영유(永儒), 영린(永麟), 영화(永和) 이며 이를 각각 1파, 2파, 3파라 부른다. 영유의 후손에 14개파, 영린의 후손에 4개파, 영화의 후손에 4개파가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 생활근거지가 파주 금촌으로 옮겨졌는데, 여러 사화를 겪으면서 전국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으며, 종가는 서울 도동에 있다가 다시 이북 연백으로 옮겨졌다. 특히 관향지 순흥에 살던 종족들은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드러난 조상으로는 시조의 증손 안향이 1260년[고려 원종 1년] 18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주판관(尙州判官)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충령왕(忠烈王) 복위 때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유학(儒學)의 학풍(學風)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문하(門下)에서 백이정(白이正), 우 탁(寓倬) 등 훌륭한 유학자(儒學者)가 배출,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겨 문묘(文廟)를 비롯한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장단 대덕산에 있고, 경기도 부곡에 안자묘(安子廟)가 있다.
영린의 후손으로 안문개(安文凱 ?∼1338)가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일로 원나라에 불리어 가 4년동안 억류되어 있었을 때 함께 있으면서 왕을 위한 경비를 국내에서 염출하여 조달하였는데 원나라 조정에서 종정부(宗正府)에 가두었다. 왕을 따라 귀국한 뒤에 첨의참리(僉議參理)가 되었고, 1327년(충숙왕 14)에는 왕이 원나라에 있었을 때 충절을 바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며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의 호를 받았다. 1330년(충혜왕 즉위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송천봉(宋天鳳)·홍언박(洪彦博)·이달존(李達尊)·이문정(李文挺)·최재(崔宰)·정운경(鄭云敬) 등 33인과 명경(明經)·은사(恩賜)각 2인을 급제시켰고 옥대(玉帶)를 하사받았다.
영화의 후손으로서 1324년(충숙왕11)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한 근재 (謹齋) 안축(安軸)은 충혜왕(忠惠王) 때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순흥의 자연경관을 노래한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었으며「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文集)을 남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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