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씨(安氏)의 본관(本貫)과 순흥안씨(順興安氏)에 대(對)하여

알아두면 유익한글

안씨(安氏)의 본관(本貫)과 순흥안씨(順興安氏)에 대(對)하여

키다리아 2012. 4. 4. 06:45

안씨(安氏)의 본관(本貫)에 대(對)하여

 

본관(本貫)은 문헌(文獻)에 109본이 전(傳)해지나

주요(主要) 본관(本貫)은 순흥(順興)·죽산(竹山)·광주(廣州)·강진(康津)·

탐진(耽津)·신죽산(新竹山)·경주(慶州)·안동(安東)·수원(水原)·평안(平安)·

순천(順川)·공산(公山)·태원(太原) 등 10여 본(本)이다.

이 가운데 순흥(順興)·죽산(竹山)·광주(廣州)의 3본이 대본이며,

특히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전체 안씨 인구의 과반수를 상회한다.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시조(始祖)는 자미(子美)로

그는 고려(高麗) 신종(神宗) 때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냈으며

후(後)에 신호위상호군(神號衛上護軍)에 추봉된다.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자미(子美)의 세 아들

영유(永儒:一派)·영린(永麟:二派)·영화(永和:三派)를

파조(派祖)로 하는 3파로 대별(大別)된다.

 

죽산안씨(竹山安氏)의 시조(始祖)는

당나라 출신(出身) 이원(李瑗)의 장남(長男) 안방준(安邦俊)이다.

이원은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 때 건너와 정착(定着)했으며

그에게는 지춘(枝春)·엽춘(葉春)·화춘(花春)의 세 아들이 있었다.

이들은 경문왕(景文王) 때 왜구를 무찌른 공으로

안씨(安氏) 성을 하사(下賜) 받았으며

지춘은 방준으로 개명(改名)하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다.

 

광주안씨(廣州安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의 대장군 방걸(邦傑)로 그는 광주(廣州) 지방(地方)의

반란(叛亂)을 진압(鎭壓)한 공으로 대장군에 오르며 광주군에 봉해져

광주(廣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성씨(姓氏)를 갖게 된 유래(由來)는 당시(當時)에 성씨(姓氏)가 없었으나

태조(太祖)가 후삼국을 통일(統一)한 후 지방(地方)

유력자(有力者)들에게 성씨(姓氏)를 갖게 하는 정책(政策)에 따라

안씨(安氏) 성을 갖게 되었다.

 

탐진안씨(耽津安氏)는

순흥안씨(順興安氏) 시조(始祖) 자미(子美)의 6세손(世孫)인

목(牧)의 셋째아들 원린(元璘)을 시조(始祖)로 하는데,

원린(元璘)의 아들 우(祐)가 홍건적의 침략(侵略)을 막은 공으로

오성군(鰲城君;오성은 탐진(耽津)의 옛이름)에 봉해진 뒤

탐진(耽津)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분관(分貫)하였다.

 

신죽산안씨(新竹山安氏) 역시(亦是) 안목(安牧)의 둘째아들로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진 원형(元衡)을 시조로 하여

순흥안씨(順興安氏)에서 분관(分貫)하였다.

탐진안씨(耽津安氏)와 신죽산안씨(新竹山安氏)는 각각

순흥안씨(順興安氏)의 탐진군파와 죽성군파로 불리기도 한다.

 

안씨는 조선에서 총 227명의 문과 급제자,

상신 2명, 문형(대제학) 1명, 청백리 5명과 많은 공신을 배출했는데,

벼슬의 열력에서는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으뜸간다.

 

 

순흥안씨(順興安氏)에 대(對)하여 

 

1. 시조 : 안자미(安子美)

 

2. 유래 :

1170년 고려 의종(毅宗) 24년

(경인 庚寅)에서 1180년 명종(明宗) 10년(경자 庚子)사이에

경북 순흥(慶北順興= 當時 順安縣)에서 탄생(誕生)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高麗) 신종(神宗) 때

흥위위(興威衛) 보승별장(保勝別將) 을 지내시고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귀현(貴顯)으로 인하여

신호위(神虎衛) 상호군(上護軍)을 추봉(追封) 받으셨다.

 

묘(墓)는 본시 순흥 소백산하(小白山下)에 모셨는데

묘(墓)의 표식물이 없어서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후손(後孫) 기명(基命)이 주관 발간(主管 發刊)한 갑신파보(甲申派譜)

즉 1824년 간행된 순흥안씨 3파댁 파보(波譜)를 보면

진위 종인(宗人)의 가첩(家牒)에 우리 시조(始祖)에 관하여

몇 가지 지적 기록(記錄)된 사실(事實)을 알게되어

당시 종중에서 확실한 고증을 얻어 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것이다.

 

시조(휘 子美)의 묘(墓)는

순흥부 동 영마암(東永磨巖)에 있고 부인은 압해정씨(押海丁氏)

추밀부사(樞密副使) 광서(光瑞)의 녀(女) 운운(云云)이나

전보(前譜)에 기록이 없고 당시 영천(永川) 정원욱(丁元旭)이 보존(保存)한

구보(舊譜)를 열람한 바 “문하시중평장사태보내사령(門下侍中平章事太保內史令)

혁황(奕煌)-여(女) 안자미(安子美)”로 등재 돼 있고

그 외손(外孫)난에 2세 추밀공(樞密公, 3세 태사공(太師公),

4세 문성공(文成公)의 휘자(諱 啣)이 연계 등재돼 있으나

신중한 일로써 직서불가(直書不可)하여

이에 응창 단기(應昌 壇記)를 기록(記錄)해둔다. 는 뜻을

족보(族譜) 기록에 남겨두고 있다.

 

3. 시조이전의 역사  

시조(始祖) 공(公)의 이전(以前)에도 우리 선대(先代)가 계셨을 터인데

시조(始祖) 이래, 후손(後孫)들이 그곳 순흥(順興)에서 세거(世居)하였기에

관향(貫鄕)으로 삼은 것이다. 

처음으로 간행(刊行)된 족보(族譜)에는

시조(始祖) 이전(以前)에 대(對)하여는 아무런 기록(記錄)이 없다.

여기에 대(對)하여 이 족보(族譜)(병오보)의 서문에서는

기록(記錄)할 수 없었던 사유(事由)를 다음과 같이 기록(記錄)하고 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시조(始祖) 이전(以前)의 가첩(家牒)이

전(傳)해 내려 온 것이 없어서 기록(記錄)을 다하지 못하니

이런 점이 오늘날 한(恨) 없이 슬프다.

지금 수보(修譜)하지 않으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이렇게 한탄(恨歎)하고 게시다.

이로보아 당시(當時)의 그 선조(宣祖)님들의 심정(心情)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족보(族譜)가 간행(刊行)된지 벌써 450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시조(始祖) 이전(以前)의 역사(歷史)에 대(對)해서는

아무런 기록(記錄)이나 유물이 발견(發見)하지 못하니

결국 우리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시조(始祖) 공(公)의 탄생(誕生) 연대(年代)로부터

지금까지 800년의 역사(歷史)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시조(始祖) 휘 자미(子美)에게는

아들 3형제(兄弟)가 있어 큰 아들 휘 영유(永儒)의 후손(後孫)들을 1파로,

둘째 아들 휘 영린(永麟)의 후손(後孫)들을 2파로,

셋째 아들 휘 영화(永和)의 후손(後孫)들을 3파로 구분(區分)하였다.

 

시조(始祖) 상호군의 연대(年代)에 대하여

일부 문헌(文獻)에는 남송 순희(南宋淳熙) 9년 즉

고려 명종(明宗) 12년(1182)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문중(門中)에 전(傳)해오는 족보(族譜)와 회헌실기(晦軒實記)에

근거(根據)할 수밖에 없다.

이것에 의하면 위에 말한 벼슬을 하고 추봉을 받은 일이 있고,

또 큰 아드님이신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휘 영유(永儒)께서

신종(神宗) 4년 신유(辛酉)(1201)생으로 되어있다.

또 3세 태사공(太師公) 휘 부(孚)께서는 1220년에

3파 5세 밀직제학공(密直提學公) 휘 석(碩)께서는 1260~1267년에

탄생(誕生)하신 것으로 추측되니 시조(始祖) 공(公)께서는

의종 24년(1170년)부터 명종(明宗) 10년(1180년)사이에

탄생(誕生)하신 것으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4. 시조의 묘소

 묘소는 순흥(順興)의 소백산 아래에 있다고 전(傳)해오나 찾지 못하고,

순원군 응창공(應昌公)께서 1647년 평리촌에 시조공의 제단을 마련하고

향려단과 세연지비(洗硯地)등을 건립했다.

무오년에 후손(後孫) 종욱, 상봉, 교덕이 사단비를 세우고,

추원재(追遠齋)를 이건(移建)했음을 총록에 기록되어있다.

순흥(順興)의 시조사단 이전중건사업은 1985년부터 시작했다.

전국(全國)의 종원 5.000여명이 성금(誠金)을 기탁(寄託)하여 순흥면 읍내리의 비봉산 43,000평을 종산(宗山)으로 매입하고 그곳에 시조단(始祖壇) 과 후손(後孫) 11基(기),

추원단비 등을 건립하고 성역화(聖域化)하였다.

 

시조께서는 고려(高麗) 신종(神宗)때

군 수뇌부(軍首腦部)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 保勝別將=현재 군장성급)을 지내시고,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현 군 고위장성급)을 추봉(追封) 받으신

존엄(尊嚴)한 어른이셨다.

 

 

5. 순흥안씨 계파

 

1파 (14개파)

1) 참찬공파 : 파조 玖(구)

2) 찬성공파 : 파조 璟(경)

3) 직장공파 : 파조 琇(수)

4) 서파공파 : 파조 理(리)

5) 감찰공파 : 파조 從禮(종례)

6) 첨추공파 : 파조 從義(종의)

7) 도정공파 : 파조 從廉(종렴)

8) 참판공파 : 파조 從信(종신) 후손 안 중근

9) 참의공파 : 파조 從儉(종검) 후손 안창호

10) 부제학공파 : 파조 祖同(조동)

11) 한림공파 : 파조 垂(수)

12) 죽성군파 : 파조 元衡(원형) 신죽산안씨 시조

13) 탐진군파 : 파조 元璘(원린) 탐진안씨 시조

14) 판관공파 : 파조 愼(신)

 

2파 (4개파)

1) 안원군파 : 파조 處(처)

2) 충정공파 : 파조 俊(준)

3) 의랑공파 : 파조 天鳳(천봉)

4) 소의공파 : 파조 天保(천보)

 

3파 (4개파)

1) 문정공파 : 파조 軸(축)

2) 제주공파 : 파조 輯(집)

3) 중랑장공파 : 파조 乙壽(을수)

4) 검교공파 : 파조 得仁(득인)